이미 밤 12시가 지났을 것이다. 후다닥, 누군가가 내 이불을 걷어찬다. “야! 이 제목 어때!” 애송이 기획실 직원으로 영화에 들떠 살던 60년대 초반의 총각시절,나는 신상옥 감독이 살던 장충동집 건넌방에서 기식하고 있었다.


“너 어디서 살어 ?!” “회사 근처에서 하숙하고 있습니다.” “야! 궁상떨지 말고 ,우리 집 빈방이 있으니 내일 당장 들어와.”


하늘같은 왕초와 한 지붕아래 산다는 것이 꿈같기도 하려니와, 우선 돈 안 들고 먹고 살 수 있으니, 주저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대궐 같은 집안의 일원이 되어 고급 식사와 잠자리 등 이제 팔자가 늘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 왕초는 나에게 잠을 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집에 살면서도 나는 신상옥 감독이 잠자는 모습을 정말 본적이 없다. 밤중에도, 화장실에 있다가도, 메모 쪽을 들고 뛰어 나오거나 손에서 시나리오가 떠나지 않는다. 단잠이 들 만하면 건너와 내 이불을 걷어차며 하는 말은 언제나 똑 같다.


“이 제목 어떠냐? 이 아이디어 어떠냐?”


사무실에서 하던 일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정도는 고사하고. 이건 밤이 새도록 끝이 없다. 자다가 일어난 애송이가 “안 좋은데요.” 할라치면 “개새끼” 하고 피식 웃으며 나가버린다. (나 역시 이때부터 “개새끼”라는 표현을 최상의 ‘애칭’으로 알고, 기특한 후배에게 “개새끼”하는 버릇이 생겼다.)


세 번, 다섯 번, 아홉 번을 “아닌데요.” “별로예요” 하던 기획실 애송이가 “아. 이거 좋은데요.” 하며 벌떡 일어나면 그렇게 좋아하던 거물 신상옥 감독, 그 영화인의 표정을 당신에게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로맨스그레이>를 연출하면서 현장이 만족스러웠던지, 감독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을 드나들었다. 1963년 이었다. 하루는 나도 <로맨스그레이>를 촬영 중인 세트장에 들렸다. 신필름 세트장은 영화인들의 열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카메라를 잡고 촬영에 심취해 있는 신상옥 감독의 폼도 멋지려니와 모든 스탭들의 집중력도 대단했다.


 “카앗 !!” 감독이 카메라를 잡고 선채 아무 말이 없다. ‘캇’ 소리에 스탭들은 죽은 듯 감독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르던 중 호통이 떨어진다.


“소품부! 우리 집에 가서 최 여사(최은희) 옷장, 화장대, 다 가져와 !”


<로맨스그레이>는, 바람을 피우는 대학교수(김승호 분)가 부인에게 혼쭐이 나는 이야기다. 남편이 숨겨 놓은 여자인 호스테스의 침실을 발견한 부인(최은희 분)의 친구들이 쳐들어와서 남편이 사주었을 고급 가구들을 다 깨부수고 난장을 피는 장면이 오늘 세트장에서 촬영할 내용이다.

메이저영화사 신필름의 소품실 수준은 국내 최고였다. 서민부터, 상류층에 이르기까지의 웬만한 가구들은 이미 소품실에 가득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은 채, 관객이 보면서 아까워 할 수준의 정말 좋은 가구를 부수고 싶었다. 그러다가 자기 집 안방의 가구가 생각난 것이다. 안방의 주인은 당대의 최고 톱스타 최은희 였기에, 그 가구들은 당연히 최고급이었던 것이다. 뜻밖의 지시에 잠시 멍해 있던 소품부들은 “뭐 하는 거야!!” 하는 감독의 호령에 기겁을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장면은 결국 통쾌하고 멋지게 촬영되었다. 신상옥 감독은 만족해 즐거워했지만, 제작부와 소품부등 직원들은 어쩔 바를 모른다. 다 부셔진 최은희 여사의 옷장과 화장대를 보며 어쩔줄을 모른다.


“이건 어떻게 하지요 ?” “우리 집 담장 밑에 다시 갖다 노라우”

별 일 아니라는 듯 퉁명스러운 대답 한마디 남기고, 감독은 세트장을 나가 버린다. 그날 밤, 내가 옆방에 있다는 것은 상관도 없다는 듯, 신상옥, 최은희부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게 당신이 사준 가구냐구요?! 모두 내가 출연료 받아 산건데 그럴 수 있어요?!”

최은희여사는 몹시 울었다. 신상옥 감독은 껄껄 웃는다.


“하.하.하. <로맨스그레이> 흥행 잘 되면 더 좋은 걸로 사줄게. 하.하.하”

최은희의 눈물을 지워줄 큰 사랑을 그날 밤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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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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