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듯, 이름 없는 별들이 쌓이고 쌓여 ‘한국영화’란 100년 산맥을 만들었다. 산업으로써의 한국영화 발전과 더불어 나의 영화인생을 더듬어 보는 지면에서 먼저 거론하지 않고는 한발 짝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이제 고인이 된 이름 하나를 찾아낸다. 잔혹한 영화검열시대를 나와 함께 헤쳐 온 영화 동지 김학덕 이다.

키 크고, 서글서글하고, 착한심성을 가진 충북 괴산사람-그는 하루 종일 술 냄새를 풍기며 살았다. 필자가 T영화사의 전무로 일할당시 그는 당시 나와 같은 회사에서 공보부 (현 문화관광부) 담당 상무로 일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쯤 군사통치시대의 영화행정은 공보부 독단으로 이루어 졌고, 때문에 경쟁에 앞서야 사는 기획자란 직업은 공보부의 행정만능주의를 어떻게 요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었다. 모든 것이 통제를 받던 그 시대의 영화기획이란 ‘아편밀수’ 만큼이나 힘겨웠다. 그런 점에서 김학덕은 슈퍼맨이었다. 공보부를 상대하는 모든 영화사 직원들 중에서도 우뚝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일처리를 잘 해내는 사람이었다. 유능한 그에게 불가능이란 거의 없었다. 공무원들과 같은 시간에 공보부로 출근하고 거의 매일같이 공무원들의 퇴근 시간에 회사로 들어오는 것이 김 상무의 일과였다. 하루의 업무보고는 회사가 아닌 거의 대포 집에서 주고받기 예사였고, 거나하게 취하면 늘 그는 우리 두 사람의 콤비네이션은 국보적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우리는 홍콩의 액션스타 ‘로웨이(羅維)’를 불러서 한,홍합작 태권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액션영화에 일가견이 있던 김정용 감독을 연출자로, 로웨이와 함께 윤인하, 강룡등의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 이 기획은 당시 흥행사들에게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촬영이 시작되자 나는 김상무와 비밀 작전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제목으로 붙여야한다. 그러나 이 제목이 공보부 심사의 관문을 뚫기가 어려우니 (당시는 조금이라도 독특해보이거나 강해보이는 제목은 모조리 반려되는 시기였다.) 순차적으로 <다섯 손가락> <홍콩의 다섯 손가락> <다섯 손가락은 죽지 않는다.> <죽음의 태권제왕>등의 통과하기 쉬운 제목부터 조금씩 제목을 바꾸며 마지막에 <죽음의 다섯손가락>이 통과 되도록 최대한 여러차레 <영화제명 변경신청 제도> 를 활용하라.’라고 나는 김상무에게 지시했다.


설명을 들은 김상무는 내가 최종 목표로 하는 <죽음의 다섯손가락>이라는 제목이 흥행성이 있다고 동의하며 자신이 해결할 수 있으니 염려마시라고 장담을 했다. 우리 둘은 모의(?)를 마치고 집행에 들어가 영화촬영이 끝날 즈음에 드디어 원하던 목적지까지 이르렀다. 계획대로 무려 9번의 제명변경신청을 통해 결국 <죽음의 다섯손가락>이란 제목이 공보부에서 통과가 된 것이다. 그런 과정동안 물론 김상무는 날마다 공무원들과 소주예술(?)을 해야했다.


제목이 통과된 날, 대포집에서 나와 마주앉은 김상무는 변함없이 거나하게 취한채로 말했다.


“우리 둘이가 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 포스터도 완성되었고, 후반 작업이 끝나는 대로 정해진 날짜에 전국개봉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아!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랴. 개봉이 임박한 어느 날 오후 3시 쯤 이라고 기억한다. 벌써 술 냄새를 푹푹 풍기며 김상무가 내 방에 들어왔다. 김 상무는 충혈 된 눈으로 울고 있었다.


“전무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새로 나온 조정관이 문제를 걸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정관은 L 소위였고, 조정관의 한마디는 장관도 피해가는 시기였다. L소위는 하나의 영화가 9번이나 제명을 변경한 사실에 무슨 의혹이라도 있지 않나 의심하며 지난 자료들을 파헤쳐고 결국 우리의 의도를 알아낸 것이다. L 소위는 당장 제목을 바꾸라며 난리였다. 개봉을 몇일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제목을 다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김상무가 울며 내 방으로 들어올 만큼 큰 일이었고, 나도 몹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냉정을 잃지 않는 틀은, 나의 사부인 신상옥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무슨 수가 없을까?’ 김상무가 먼저 입을 떼었다.


“ 전무님,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상무는 그날 퇴근시간에 맞추어 날더러 공보부 영화과로 들어와 달라고 부탁했다. 영화과의 문을 박차고 들어와 강하게 자신의 따귀를 내리 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 있는 L소위가 깜짝 놀랄테고,  동정심을 이용하여 제목을 통과시키자는 것이 김상무의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슬픈 김상무의 각본을 들고 나는 약속된 시간에 영화과 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소리쳤다.


“이 개새끼! 김상무! 김학덕 어딨어?!!”


내가 소리를 치자 김상무가 고개를 떨구고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주저없이 김상무의 따귀를 2번이나 강력하게 올려 부쳤다.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해!  당신, 회사 말아먹을 작정했어?! 개봉이 낼모레인데 이게 무슨 소리야. 제목 어떻게 됐다구?!”


나는 쉴 틈 없이 김상무를 몰아붙였다.


“전무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인채로 서 있었다. L 소위는 마흔 살 언저리의 사람이 그런 망신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다음날 밤, 나와 상무는 술독에 빠져서 어깨동무를 하고 충무로 밤거리를 꽥꽥 짖으며 헤매었다.  ‘따귀쇼’ 덕분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의 제목이 통과된 것이다.


“전무님, 우리 둘이가 해서 안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날 저녁 김상무는 L소위로부터 술 한잔 얻어 마시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 개자식 전무란 새끼, 키도 쪼그만게 중앙청 공무원들 앞에서... 김상무, 당신 목구멍이 포도청이구료...”


<죽음의 다섯손가락>은 개봉하여 좋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다음 해 이른 여름, 김상무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라는 것이 이렇다. 관객은 스타와 감독만을 보지만, 무수한 사람들이 빛나지 않는 여러 자리에서 머리 쓰고, 몸 쓰며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름들이 있기에 영화의 실체는 필름 쪼가리가 아닌, 하나의 산업이 되는 것이다. 한국영화 산업화의 과정을 돌아보며, 나는 슈퍼맨처럼 불가능을 모르던 영화인 김학덕을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고인에게 그날의 일을 사죄한다.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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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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