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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센터’, ‘구 부여박물관’, ‘공간사옥’, ‘경동교회’ 등 기라성 같은 작품으로 한국현대건축사에 우뚝 서있는 김수근의 평생 꿈이 ‘영화감독’이었다면 모두가 놀랄 것이다.



1986년 5월 하순쯤이다. ‘공간’의 설계실장으로 있던 친구 오기수(전, 건축가협회 회장)로부터 모처럼의 전화를 받았다. “우리 보스가 그대를 만나고 싶어 하니 시간을 내달라” 는 부탁이었다. 문화계 대 스타 김수근 씨의 요청을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한남동 순천향병원 건너편에 있는 카페 ‘가을’에서 만났다. ‘가을’은 그 당시 강남과 강북의 중간쯤에 있어, 예술인, 언론인 등 문화계 사람들이 퇴근길에 거쳐 가는 아담한 술집이다. 처음 얼굴을 마주한 김수근은 야심과 열정이 번득이는 분 이었다. 나는 검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는 ‘김수근 건축’의 매력에 푹 빠져있던 터라 지체 없이 용건부터 묻고 덤볐다. “어떻게 저를 찾으셨습니까.”



“영화감독을 하고 싶어 만나자고 했습니다. 건축학회 일 때문에 세계 각 곳을 돌아다녔지만 한시도 영화를 잊은 적이 없고, 김수근은 건축가보다 실은 영화감독을 꿈꾸며 살아 왔지요. 누가 나에게 일러주더군요, 신인감독을 좋아하는 영화 기획자 황기성을 만나 보라고. 내가 지금 영화감독을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도 감독을 할 수 있다고 보는지요?” 



그의 뜨겁고 순수한 시선에 나는 전율 같은 것을 느꼈다. 대 김수근이란 건축미술가의 내면에 이렇게 숨어 꿈틀거리는 것이 영화감독이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에 어떻게든 대답을 해야 했다. “아! 물론이지요. 선생님, 렌즈 앞의 대상을 놓고 1초 사이에 OK, NG를 결정할 수 있는 지성과 감각을 가진 사람, 그런 사람이면 누구나 영화감독을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야말로 누구보다 훌륭한 영화를 만드시지 않겠습니까!”


그날 밤 우리는 꽤 많은 맥주병을 비웠다. 김수근의 영화식견은 넘치고 넓었다. 그는 ‘쉘브르의 우산’이나 ‘흑인올페’를 좋아했다. ‘마르셀 까미유’ 감독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쟈크드미’감독의 아름다운 색채감에 매료되어 프랑스 북부 작은 도시 ’쉘브르‘까지 돌아보았다고 했다. 나는 벌써부터 들뜨기 시작했다. 이 멋진 신인감독을 앞세워 벌이게 될 영화적 모험의 출발점에 한껏 흥분하고 있었다. ‘좋은 감독과 좋은 기획자는 호흡이 중요하다’ 우리는 당장 벽을 허물고 단짝이라도 된 듯이 늦게까지 애쓰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두 사람은 선생이 외유에서 돌아오는 2주일 후, ‘가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수근은 그날 아예 레퍼토리를 정하자고 했다. 어떤 작품을 만들 것이냐 하는 결정이 그렇게 쉽게 정해질 일이 아니지만, 나는 그분이 서둘러 진행하고 싶어 하는 속내는 묻지 않고 우선 대답이라도 시원하게 해 주고 싶었다.

“영화는 감독의 것 아닙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배창호, 장선우, 박철수, 강우석 등 우수한 감독들의 초기에 같이 영화를 했다는 것이 자랑이던 나에게,  또 하나의 신인 <김수근 감독>을 만나게 된 것은 충분히 술맛 나고 취하게 만드는 유쾌한 사건이었다.



열심히 준비해가지고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이때 깜짝 놀랄 뉴스가 나왔다.

“김수근씨 별세!”

많은 문화계 사람들이 김수근의 급작한 타계를 안타까워했다. 내 앞에 아무도 모르게 거짓말처럼 지나간 영화감독 김수근은 ‘한국현대건축의 대표적 예술가’ 의 이름으로, 1986년 6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평론가 이어령은 - “그는 3차원의 언어로 시를 썼다.” 고 했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 “그는 내가 걸었을지도 모를 한 인생을 걸어주었다”고 했다.



2008년 4월, 나는 다시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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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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