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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권투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59년 박노식이 나온 <피묻은 대결>이 처음이다. 당시만 해도 멜로물이나 사극영화가 판을 치고 있었던 만큼 스포츠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미국은 일찍이 복서의 얘기를 담은 커크더글러스의 출세작 <챔피온>과 폴 뉴먼의 <상처뿐인 영광>은 물론 1977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록키>와 2005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등 수많은 권투영화가 스크린을 수놓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권투영화를 제작한다고 하니 많은 흥행사들은 미친 짓이라 비아냥거렸다.



김묵 감독은 대한권투연맹의 후원을 받고 제작자 이수환은 권투영화에 따르는 기술적인 문제를 전문가와 숙의했다. 우선 영화의 주인공 박노식과 코치로 나오는 김승호 그리고 박노식의 형으로 나오는 최봉에게 권투장면을 촬영하기 전까지 실제로 트레이닝을 시켰다. 실기연습 지도자로는 당시 대한권투연맹 이사장인 박순철과 수도권투구락부 사범인 조성구가 맡았다. 박노식은 천부적으로 운동신경이 민감해 금방 숙달되었고 김승호는 워낙 몸이 비대하고 땀을 많이 흘려 체중감량과 로드윅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범인 조성구와 남산을 오르내리며 체중조절에 안간힘을 쏟은 끝에 결국 그는 8kg을 감량하는 데 성공, 코치로서의 풍모를 제법 갖추게 되어 촬영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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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식의 형으로 나오는 최봉은 촬영을 하면서 상대방 선수의 복부를 너무 세게 때려 복통을 일으키는 사고를 빚기도 했다. 그는 두 차례 NG 끝에 실제 권투선수와 맞먹는 그럴싸한 폼을 보였으나 워낙 코가 약한 탓에 번번이 코피를 흘리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박노식은 학창시절에 권투를 한 경험이 있어 웬만한 선수와는 적수가 되지 않았던 터라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강세철 선수와 한 판 승부를 벌이자는 농담이 설왕설래될 정도였다.



당시 권투시합 장소로 유명했던 장충체육관 촬영은 단연 장안의 화제였다. 엑스트라가 대거 동원된 현장에는 배우들의 권투시합을 공짜로 구경하기 위해 장충공원 일대의 불량배와 뜨내기손님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관중들은 링 위의 권투선수 박노식과 코치석의 김승호 그리고 미모의 청춘스타 엄앵란의 모습을 보려고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엑스트라로 구경 나온 관중들이 혼잡통 속에 소매치기를 당해 촬영 팀에게 항의를 하는 소동까지 피웠고 급기야 경찰관까지 동원되어 현장을 정리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일로 김묵 감독과 제작자는 중부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나 극영화 촬영이란 점이 감안되어 무사히 풀려나왔다.



화제의 영화는 충무로의 수도극장에서 상영했으나 PR 부족 탓인지 좌우간 흥행에는 참패하고 말았다. 그 후 ‘권투영화’는 아무도 제작을 하지 않다가 1966년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물리치고 당당히 세계챔피언이 되자 김기수가 직접 출연한 <내 주먹을 사라>와 유제두의 <눈물 젖은 샌드백>이 잇따라 제작되었다. 권투영화 가운데서도 하나의 주인공을 두고 두 편이 제작된 경우도 있다. 김득구의 비극을 그린 <울지 않는 호랑이>와 <챔피언>이 그것이다. 그러나 권투영화는 리얼리티 부족으로 흥행이 되지 않는 아쉬운 선례를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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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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