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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 중동 지역에는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이 대거 진출해 수많은 근로자들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간혹 한국에 남겨져 있던 그들의 가족 가운데 본의 아니게 탈선하는 사례가 생겼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회 윤리적 문제로 대두될 조짐이 보였다. 정비석 원작소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81> 제작은 그러한 사회일각의 기류에 맞추어 반성과 비판의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간통죄 존폐 논란이 일고 있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기에 가능했던 기획이었다.



<자유부인 '81>의 진행은 순조로웠다. <나는 77번 아가씨> 등으로 멜로드라마 연출에 두각을 나타내던 박호태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자유부인’역에는 윤정희, ‘유혹남’역에는 남궁원이 캐스팅됐다. 하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원작에 대학교수였다가 작가로 바뀐 ‘남편’역에 마땅한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마침 미국으로 이주했던 최무룡이 부친상을 당해 잠시 귀국했었다. 당시 최무룡은 영화제작의 연이은 실패로 슬럼프에 빠져 영화에 대한 집념을 의도적으로 버리고자 할 때였다. 이런 상황의 최무룡을 당시 제작사인 동아흥행 최상균 부사장의 강력한 설득으로 캐스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부인 '81>은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만 30만 명이 넘는 홈런을 날렸다. 지금으로 치면 300만 관객 이상에 해당하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결국 이 영화로 최무룡의 실질적 재기가 이루어졌다. 잠시 최무룡을 잊고 있던 팬들은 “역시 최무룡”을 새삼 되뇌었다. 이를 바탕으로 최무룡의 국내활동은 본격화됐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국회에까지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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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파리에 신혼살림을 차린 윤정희도 당시 영화와 결별 상태였다. 김수용 감독은 그런 윤정희를 결혼의 테두리 속에 그냥 두기 아깝다고 생각하여 파리로부터 불러들였다. 그렇게 <화려한 외출>(1977)로 돌아온 윤정희는 <자유부인 '81>에서 진가를 재확인, 문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때가 옛날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남아 건재를 과시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배우, 특히 여배우의 경우 결혼 또는 다른 이유 등으로 조로하거나 갑작스럽게 소멸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불리한 여건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는 점에서 최무룡 윤정희의 재기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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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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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엽기플러스 2008.06.14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추억의 영화네요, 이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