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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이만희 감독은 고독했다. 그는 한국영화에서 엄연히 이단적인 영화작가였다. 당시 흑백영화는 먹으로만 그린 수묵화였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은 결코 전통적 산수화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 감독처럼 흑백 필름으로 영화를 찍었지만 철저히 새로운 화풍을 지향한 앵포르멜 영상을 시도한다. 이만희의 선각자적이며 첨단화된 영화 작업은 전통적 영화 화풍에 안주하던 영화인의 질시와 반목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만희 감독 말기에 이르면 한국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쇠퇴현상이 일어난다. 한국 사회가 급속히 근대화되면서 각 가정의 TV시대를 맞아 영화 관객들이 안방극장에 들어앉았다. 또 각종 스포츠 레저산업이 팽창하여, 외국과 마찬가지로 영화산업이 커다란 위협을 받는다. 영화계는 침체되고 영화 제작이 외화 쿼터를 얻기 위한 시스템으로 전략하자, 이만희 감독의 영화는 관객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더구나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등 영상시대 신인 감독의 등장은 그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편협할 만큼 자존심 강한 이만희 감독은 그동안 동료 영화인들과 이렇다 할 우정이나 친분을 쌓지 못했다. 그는 15년간 영화감독을 하면서 가족과도 결별해 살 정도로 오직 영화만을 위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 이후 최고의 감독료를 받는 일류 감독이었다. <열두 냥짜리 인생>을 연출할 때는 다른 감독에 비해 무려 세 배의 연출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저축할 줄 몰랐고 이재에도 밝지 않았으며 재산증식에 관해 조언하는 사람도 없었다. 미래나 노후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 땅에 영화라는 예술이 존속하는 동안 자신의 신체기능이 상실되지 않는 한 영화감독에 종사 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면서 감독이라는 명예를 지키는 품위유지비와, 평생 동지 같은 스태프와 가난한 배우들의 술값으로 감독료를 모두 사용했다.


그는 무방비 상태로 시대의 도전을 받고 자신의 영화 인생에 있어 큰 고비를 맞는다. 영화산업은 사양길로 가고 후배 영화인들은 밀려와 그도 현장에서 차츰 물러나야만 하는 현실을 맞은 것이다. 그가 충무로에 나타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자 곁에 있던 사람들도 차츰 그를 떠났다. 그가 작품을 하지 않아서 떠난 사람도 있고 영화계의 불황 때문에 떠난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이만희 감독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이만희가 자신을 떠났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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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감독 문하에는 많은 조감독이 있었다. 그 중 감독으로 데뷔하거나 영화계에 끝까지 몸담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동료 신상옥 감독이나 김수용 감독과 달리 문하생을 키우지도 않았고 문하생에게 인간적인 수장 역할도 하지 않았다. 설태호 감독과 이상구 감독 정도가 이만희 감독의 문하생에서 감독이 된 사람이다. 이 감독에게 충실했던 조감독 출신 김순식은 영화감독으로서 따로 영화사를 차려 독립했다. 김영식 김주희 등의 조감독은 영화계의 불황이 커지자 아예 충무로를 떠났다. 양택조(문정숙의 조카)도 조감독이었으나 성우로 전업했고 지금은 탤런트로 활동하고 있다. 조감독 중에 특이한 인물로는 서유신이 있다.


서유신은 조감독이 되기 위해 이만희 감독을 찾아가 간청한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이 거절하자 서유신은 제 손가락 하나를 잘라 알콜병에 넣어 이만희 감독에게 가져간다. 마치 야쿠자 세계의 이야기 같지만 그렇게 해서 서유신은 이만희 감독 아래 조감독이 되었다. 그는 <삼포 가는 길>에서 조감독을 하면서 끝까지 이만희 곁을 지켰고 이만희 감독이 별세하자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충무로를 떠났다.


<흑맥>에서 아역배우로 출연하고 <싸리골의 신화>에서 종을 치는 파수꾼 소년 역을 한 이경수는 <태양 닮은 소녀>에서는 조감독으로 참여했고 현재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작가 이경수는 인간적으로 마지막까지 이만희 감독을 보필하여 의리를 보여준 사람이다.


이만희 감독의 첫 작품부터 유작까지 편집한 편집기사 김희수 선생도 말년의 이만희 감독을 따뜻하게 지켜 본 분이다.


백결과 소설가 출신 시나리오 작가 김원두도 이만희 감독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현진영화사를 차린 김원두는 “내가 진작 영화사를 차려 이 감독에게 작품을 하게 했어야 했는데...”라며 자주 통분할 정도로 이만희 감독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삼포 가는 길>에서 이 감독에게 연출권이 주어지도록 원작자와 영화사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한 백결의 수고는 그가 이만희 감독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우정 어린 선물이었다. 실력파 기획자로서 후에 제작자가 된 황기성 사장도 말년의 이 감독에게 작품을 기획하여 연출을 맡도록 도와준 분이다.


이만희 감독 곁에는 많은 동료와 선배 감독이 있었다. 그는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김수용 등과 그다지 절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함께 어렵던 시기에 한국영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시절에 그들은 젊고 신선했으며 한국영화를 짊어질 의욕과 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선배들의 영화에 반론을 내고 진부함과 전통 양식을 깨뜨리며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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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듯 했지만 결국 한 지점에 이르렀다. 친구인 정진우 감독은 “이 감독이 <삼포 가는 길>을 녹음하다 쓰러지자 남은 3권의 롤을 맡아 녹음을 끝내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운명했더라.”라며 애통해했다.


이만희 감독 생전에는 많은 평론가와 영화담당 기자들이 이만희 감독의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영화평론의 거두인 이영일 선생은 현대영화비평가 그룹에서 선정한 ‘1974년도 감독 베스트 원’으로 뽑힌 이만희 감독에게 감독상 상패를 주기도 했다. 이영일 선생은 그가 반공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섰을 때 성심을 다해 변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희 감독은 평론이나 영화 평에 그리 관심을 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영화를 학술적 예술로 본 것이 아니라 실용적 예술로 보았다. 그리고 영화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를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보는 것에 대해 어떤 반론이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의 영결식장에는 많은 영화인들이 모여 그를 애도했다. 그들은 이만희 감독과 친했고 그를 잘 알며 존경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감독 이만희에게는 아니더라도 그의 영화와 영화정신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그를 애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행복한 생을 살다 간 영화감독이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그의 영화를 즐겨 본 관객일 것이다. 관객은 이만희 감독의 영화를 보며 수려한 영상 언어와 영화 감각에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그들 중에는 문화계, 예술계, 특히 영화계로 들어온 사람들도 많다. 그의 영화를 보며 자란 1세대를 통해 2세대 3세대 감독들이 오늘날 한국영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이끌어 가고 관객 천만 명 시대를 만들었다고 본다.


이제는 척박한 영화 시대에 독특한 영상 언어로 관객을 이끌던 이만희 감독보다 더욱 훌륭한 감독이 나올 것이다. 이 글을 끝내며 공원묘원 차가운 땅속에 잠든 이만희 감독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그러면서 그의 묘비명의 구절을 되새겨 본다.



 

“당신은 포탄 속을 묵묵히 포복하는 병사들 편이었고 좌절을 알면서도 인간의 길을 가는 연인들 편이었고 그리고 폭력이 미워 강한 힘을 길러야 했던 젊은이의 편이었다.”




 

■ 유지형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금홍아 금홍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등 30여 편에 달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이자, <됴화> <사라는 유죄>등을 연출한 감독이다. 이만희, 김기영 감독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연구실적과 자료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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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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