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승호는 1960년대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톱스타였다. 당시 한국영화는 세계적 수준에는 미흡했지만 아시아권에서는 선두를 지켰고 그 선두를 이끌어나가는 배우가 김승호였다.

김승호의 마지막 작품 <사화산>은 빨치산을 소재로 한 반공영화였다. 중앙정보부에서 제작지원을 해주었으나 김승호의 당시 경제적 사정은 연이은 제작실패로 엉망이었다.

소재가 ‘빨치산’이었기 때문에 출연배우도 보통영화의 몇 배가 넘었고 한 번 촬영을 하려면 스탭들까지 70~1백여 명의 인원이 움직여야만 했다. 가뜩이나 어려운 여건의 김승호에게 결정타를 안겨준 것은 설악산 촬영의 완전 펑크였다.

고영남 감독을 비롯하여 박노식 등 스탭 캐스트 80여명이 촬영차 설악산에 도착했다. 여관에 짐을 풀고 촬영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설악산의 기후는 변덕이 심했다. 비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가 오지 않는 것도 아닌 안개비, 시골에서는 흔히 여우비라고 하는 날씨가 계속됐다. 그런 날씨가 계속해서 일주일간을 잡아먹었다. 이제나 저제나 해 뜰 날만 기다리다보니 한 컷도 촬영을 하지 못한 채 준비해온 경비는 바닥이 났다.

박노식 최창호 지용남 등 출연자들은 하루 종일 술 마시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었고 스탭들도 여관방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마작이나 화투밖에는 할 일이 달리 없었다. 여우비는 일주일이 지나도 그치지 않았고 원망과 한숨으로 여우비를 지켜보던 김승호 입에서는 마침내 “하늘이 김승호를 버리는구나”라는 절규가 터져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국 여관비와 식대를 다 갚지 못해 김진 제작부장을 볼모(?)로 잡혀두고 촬영팀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김진 부장이 여관에서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15일 뒤였다.

얼마 안 되는 여관비 잔금이었지만, 그 돈을 만들기에도 15일씩이나 걸릴 만큼 김승호의 경제적 사정은 악화된 상태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김승호는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불세출의 명우 김승호가 남긴 생애 마지막 대사는 그의 굵직하고도 화려한 인생의 라스트 신의 대사에 걸맞은 ‘하늘이 김승호를 버리는구나’였다.

1968년 12월 5일.

이날은 아시아의 스타 김승호의 발인 날이었다. 김승호는 12월 1일, 종로구 수성동에 있는 자택에서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영화인협회는 김승호의 장례를 5일장으로 치르게 됐다.

영화인협회는 발인하는 5일에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동대문까지 운구행렬을  할 수 있도록 서울시청에 허가를 신청했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운구행렬로 인한 시내의 교통마비를 이유로 이를 불허했다.

영협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수많은  조문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해 대한통운에서 차량을 대여했고 영결식이 끝나자 장지인 금곡으로 떠나기 위해 대한통운 차량에 만장을 싣고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로 그 시간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1968년 12월 5일은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 선포식이 있었고 그 식에 참석한 박대통령이 청와대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박대통령의 눈에 김승호의 영결식을 끝낸 다음의 어수선한 시민회관 앞의 분위기가 잡혔고 “저게 뭐냐?”는 질문이 떨어졌다.
마침 차에 타고 있던 박종규 경호실장은 “영화배우 김승호의 영결식” 이라고 대답했고 평소에도 시간이 나면 한국영화 보기를 즐겨했으며 특히 김승호를 좋아했던 박대통령은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몹시 아쉬워했다.
그런 대화 끝에 박종규 실장은 시내 교통마비 때문에 김시장이 도보운구행렬을 불허한 모양이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상황설명을 덧붙었다.
그러자 “그게 무슨 소리야. 아시아의 별이 떨어졌는데 장례행렬을 못하게 하다니...” 즉시 대통령의 특명이 떨어졌고 그 전화는 광화문 파출소에까지 전달되어 대한통운의 화물트럭에 실려 떠나려던 장례행렬은 다시 도보행렬 대열로 재편성하게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승호의 장례행렬은 임금님의 그것과 비교될 만큼 대단했었다.
여배우들은 모두 소복을 입었고 남자들은 검은 예복을 입었다.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동대문까지 이르는 연도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나와 마지막 떠나는 김승호를 애도했다.
한국영화 70년사에 많은 별들이 명멸했지만, 아직까지 김승호처럼 팬들의 사랑을 받은 대스타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영화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 김승호.
그러나 그의 말년은 비운의 연속이었고 그의 마지막 제작영화 ‘사화산’(死火山)은 스스로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영화이기도 했다.




 

신고
Posted by ⓗⓚⓢ 인터뷰365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