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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리즈는 80, 90년대 활발하게 활동하던 영화계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1993년에 쓴 글입니다. 그 세 번째로 80년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창호 감독과의 인터뷰를 소개합니다.

 


1976년 충무로에 웬 괴물청년이 나타났다. 그 청년은 다짜고짜 화천공사 사장을 찾아갔다.

사장을 독대하는 자리에서 청년은 말했다. “나를 화천공사 기획실장으로 써준다면 1년에 관객 10만이 넘는 영화를 세 편씩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만약 나를 쓰지 않는다면 영영 후회할 겁니다.”

뚱뚱한 몸집에 안경을 쓴 이 청년의 이름은 배창호였다.

화천공사 사장은 연세대 상대 경영학과 출신의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가 난데없이 나타나 기획실장을 해보겠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연세대 출신 작가 최인호에게 자문을 구했다. 최인호와 배창호는 대학 연극반 시절부터 아는 선후배였다. 최인호는 배창호에 대해 “약간 돈 놈”이라고 했고 기획실장 자리는 당연히 퇴짜였다.

1년 뒤 배창호는 다시 최인호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시나리오를 한 편 써들고 왔는데 현대종합상사 사원으로 입사한 처지였다. 감독이 될 작정이라는 귀찮은 그 후배를 최인호는 이장호 감독에게 떠넘겼다. 당시 이장호는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명보극장 뒤에서 ‘모랑’이라는 술집을 경영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한동안을 ‘모랑’에서 술을 마시고 지내던 배창호는 1년 뒤인 1977년, 케냐의 나이로비에 현대종합상사 지사를 설립하라는 특명을 받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2년 뒤 배창호는 다시 충무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능한 현대맨이 된 그가 사표를 내던지고 귀국한 이유는 단 하나, 이장호 감독이 해금돼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은 <갑자기 불꽃처럼>이었고 배창호에게는 제2조감독 일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 촬영은 단 하루만에 정지됐다.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의 원칙 때문에 이 감독만 해금시켜 줄 수 없다는 관계기관의 결정 때문이었다.

이 감독은 배창호에게 다른 감독을 소개시켜주고자 했지만 배창호는 이 감독과 동고동락하기로 한다. 이때 현대 시절 번 돈 다 털어내고 집도 두 번이나 줄여 이사를 했다.

12.12사태로 드디어 이 감독이 자유의 몸이 되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만들게 됐다. 배창호는 그동안의 ‘의리’를 인정받아 단숨에 제1조감독이 됐다.

그러나 애오라지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오던 청년 배창호가 실제로 접한 영화현장은 너무 남루했다.


“카메라는 낡아서 군데군데 테이프로 붙여져 있죠, 생전 처음 듣는 일본 말이 일상어로 돼있죠, 거기다 제작부장은 무섭기만 하죠, 과연 내 이상을 이룰 수 있을까, 과연 나를 감독을 시켜줄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그래서 방황을 많이 했어요.”


배도 고팠다. 당시 톱 클래스이던 배우 유지인이 단 3일간 출연하고 받는 개런티가 3백만원이었는데 배창호의 당시 일당과 비교하면 330배가 넘었다.

이 감독 밑에서 <어둠의 자식들>로 두번째 조감독을 하고 나서 비로소 감독 데뷔 기회가 생겼다. <어둠의 자식들>의 작가 이동철(본명 이철용으로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다)이 다음 작품 영화 판권을 배창호에게 주기로 약속했고 그 작품이 <꼬방동네 사람들>이다.


“촬영을 해와서 러쉬를 봤는데 김원두 사장이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아뿌가 없어 아뿌가!’. 영어 클로즈업에서 업(up)만 떼내 일본식으로 발음한 거죠. 외국영화 많이 본 탓에 멋있게 롱샷만 찍었는데, 감정이 살아나지 않는다, 클로즈업을 찍으라는 주문이에요. 한 3천자 찍은 걸 다 버리고 다시 찍었어요.”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이어 <철인들>이라는 계몽극을 찍어 사람들을 아리송하게 만든 배 감독은 최인호 원작의 <적도의 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난다.

최인호가 배창호 영화 가운데 베스트로 꼽는 <적도의 꽃>은 초반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관객들의 입선전에 힘입어 1983년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남자 주인공 미스터M은 다소 위압적이고 질투심 강한 배감독 자신의 성격과 부드러운 안성기의 성격이 혼합된 캐릭터였다.


“<적도의 꽃>이 상영되고 있던 단성사의 맞은편 피카디리극장에서 <부시맨>이 상영중이었는데 대단한 인기였어요. 웬 영화길래 하고 들어가 보니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죠. ‘철판만 좀 깔고, 양념을 더 치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히트작 <고래사냥>이다.

지식인이지만 거지 노릇을 하는 왕초, 벙어리 창녀, 소심한 대학생 병태가 주인공이었다. 왕초 역에는 이미 안성기를 점찍어 놓았고, 벙어리 창녀 역에 처음 생각한 것은 강수연이었다. 그런데 강수연은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기 때문에 윤락여성 역을 맡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신인티는 가셨지만 그리 활발하게 활동하지 않고 있던 이미숙을 캐스팅했다.

병태 역에는 안성기가 가수 김수철을 추천했는데, 비디오로 보니 불량기도 있어 보이고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라 흘려버렸다. 하길종 감독이 <바보들의 행진>에서 대학생 윤문섭과 하재영을 캐스팅해 성공한 경우도 있고 해서 대학생들을 꽤 만나보았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병태 역 찾기가 난항에 부딪히고 있을 때 어느 잡지사 기자가 다시 김수철을 추천하더라구요. 그때 난 그 사람이 가수인 줄도 몰랐어요. 그래 한번 스태프들이 모인 다방으로 나와보라고 했죠. 다방 문을 열고 조그마한 사람이 하나 들어오는데 꺼부정한 모습이 영락없는 병태더라구요.”


모두들 임자 나타났다고 무릎을 쳤다.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송이’라는 노래가 막 히트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김수철에게는 따로 연기 지시를 한 것이 별로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했고, 김수철은 아직도 그의 독특한 매력으로 꼽히는 ‘귀여운 꺼벙이’ 모습 그대로 병태 역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으니 합격점 이상이었다.

<고래사냥>에서 왕초 안성기의 의상비는 단돈 3천원. 온갖 가재도구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왕초의 외투 등은 남대문 시장 꽃시장 옆,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들 옷 버린 것을 파는 데서 샀다. 아직 총각이던 안성기는 바느질까지 직접 해 왕초 옷을 만들었다. 영화 내내 벗은 적이 없는 국방색 털모자는 나중에 <안녕하세요? 하나님>에도 다시 쓰고 나온다.

배 감독은 <고래사냥>의 시사회 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나 평론가들은 여간해서는 웃거나 울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 <고래사냥>은 달랐다. 예닐곱 번의 웃음보따리가 풀어졌다.

이 영화가 피카디리극장에서 상영 중일 때 그 옆 골목 분식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영화 속에서 왕초가 떡볶이와 순대를 맛있게 먹는 장면에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고래사냥>이 흥행에 성공하자 매스컴에서는 배창호 감독을 ‘한국의 스필버그’ ‘황금알을 낳는 거위’ 등으로 부르며 사다리를 태웠다.


“주머니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죠. 사실, 출연 섭외 때문에 연기자들 만나면 혹시 비싼 주스라고 시키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던 시절이 꽤 오래 계속되었거든요. <고래사냥>으로는 내 나름대로 흥행감각을 얻었다고 자부했죠. 양념을 더 치면 되더라구요. 진짜 생선을 잘 굽는 사람은 소금만 쳐서 그 생선의 맛을 내는데, 거기다 기름도 좀 바르고 설탕도 치는 거죠.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구성을 더 짜고 감정을 약간 더 건드려 주는 법을 알게 된 겁니다.”


배 감독은 속편을 만들면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에 으쓱하여 <고래사냥 2>를 만들었다. ‘발가락으로 찍어도 될 줄 알았던’ 속편은 참패했다. 관객들은 냉정했다. 자성하는 마음으로 다른 식의 <고래사냥>을 만들었다. 그것이 <안녕하세요? 하나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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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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