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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및 홍콩영화들과의 합작이 한창이던 70년대, 적도의 나라 인도네시아 영화팀이 우리나라에 온 일이 있었다. 겨울 눈 장면을 배경으로 하는 액션영화를 만들 목적에서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정유공장ㆍ고무농장 주정사업을 하던 재력가 삼수 싯달라를 비롯, 감독과 여주인공 등 다섯 명으로 꾸려진 단출한 제작진이었다. 한국의 스탭과 배우가 합류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일행 중 여배우 데비는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는데 갸름한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매혹적인 미인이었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식사 시간에 명동에 있는 설렁탕집에서 모였다. 이미 다섯 명 모두가 콧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복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라 겉옷만 잔뜩 겹쳐 입었을 뿐, 추위를 견뎌내는 방법을 몰랐다. 걱정이 되어 내복을 나눠줬더니 몇 시간이 지나 답답해서 도저히 못 입겠다고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윽고 한국 측 영화팀과 상견례를 했다. 대양필름 한상훈 사장과 박종훈 감독, 그리고 신일룡 김영일 이해룡 박동룡 등 출연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여배우 데비는 남자주인공 신일룡을 보더니 만면에 희색이 돌았다. 이후 그녀는 시간만 있으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패션쇼라도 하는 마냥 아침 점심 저녁 때를 달리하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저런 눈치를 모를 리 없는 신일룡은 하지만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러니 데비는 더욱 몸살이 날 수밖에. 끝내 데비는 “왜 한국 촬영장면에는 남녀 주인공이 만나 사랑하는 장면이 없는지 모르겠다”며 본심이 담긴 불만을 토로했다.


본격적인 촬영을 위해 용평스키장으로 떠났다. 눈송이가 가끔씩 흩날리던 날이었다. 버스가 강원도에 들어서면서 멀리 하얗게 덮인 산이 펼쳐지자 인도네시아 일행에게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입에서 “원더풀” “뷰티풀”이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용평스키장 주차장에 버스가 다다르자 이들 적도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운전석 쪽 차창으로 몰려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스키장의 생동감 넘치는 현란한 그림은 “원더풀” “뷰티풀” 소리마저 빼앗아가 버렸다. 차에서 내린 그들의 발길은 호텔 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목과 얼굴은 반대편인 스키장 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최초로 눈을 담은 인도네시아 영화 <광사비호>(Lion and Tiger)는 이렇게 스타트가  됐다.


도착 당일에는 촬영이 없었다. 이들은 완전 중무장을 하고 스키장으로 나왔다. 눈을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뭉쳐서 던져보고…. 마침내 깔깔거리며 눈싸움이 벌어졌다. 이미 만들어져 있던 눈사람을 보더니 마치 애인이라도 만난 듯 다투어 사진을 찍어댔다. 난생 처음으로 스키를 신고 산정에 올라가 본 인도네시아 배우 목다르는 리프트가 서지 않고 그냥 진행되는 걸 모르고 우물쭈물하다가 그만 착지점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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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신일룡과 김영일은 각각 아침운동을 하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 10도. 두 사람이 트레이닝복만 입고 운동하는 모습을 본 인도네시아 일행은 이불 속에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들이 영하10도에서 견디는 시간은 길어봤자 3시간 정도였다. 턱이 덜덜덜 떨리다가 이빨 부딪치는 소리가 딱! 딱! 딱! 하고나면 촬영은 중지해야만 했다. 그때쯤이면 이들은 거의 동태(?)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철저한 회교도인 탓에 돼지고기 음식은 입에도 안 댔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뜻밖에도 삼계탕이었다.

맥주집에서 쫑파티를 할 때의 일이다. 과일과 포, 메뚜기튀김이 안주였다. 그들은 새까맣게 탄 메뚜기튀김을 보더니 신기한 듯 먹으면서 수군댔다. 접시가 바닥이 나자 그제야 이게 뭐냐고 물었다. 메뚜기를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생각이 안나 종이에 대충 메뚜기 모양을 그려서 보여줬다. 그랬더니 모두들 놀란 토끼눈이 되어서 “브라랑?!”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약속이나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직행했다.

알고 보니 ‘브라랑’은 메뚜기를 뜻하는 말이 맞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브라랑’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낯설고 물설고 기후와 음식, 말과 생활이 다른 외지에서 촬영한다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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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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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egacy010 2008.07.25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세대 나이와 상관없이 즐겨 읽은 수 있는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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