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월하의 공동묘지>와 <백골령의 마검>의 흥행으로 반듯한 장르로 자리 잡을 것처럼 보였던 공포영화는 의외로 70년대에 들어서며 침체기를 겪는다. 그렇게 된 대표적 이유로는 물론 장르내의 다양한 소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지속적인 ‘공동묘지’와 ‘소복귀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큰 암초는 바로 TV의 보급이었다. 특히나  1977년부터 <마니산 효녀>를 시작으로 1989년까지 매주일 방송된 TV시리즈 <전설의 고향>은 한국공포영화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어차피 돈 내고 극장에 가도 똑같은 소복귀신을 보는 셈이었으니 TV로도 관객 입장에선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당시의 공포영화는 대부분 흥행에 참패하게 되고, 기획자와 흥행사들은 더 이상 공포영화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이때 그나마 한국 공포영화의 명맥을 유지한 대표적 감독으로는 ‘박윤교’와 ‘김인수’를 들 수 있다.

왼쪽위부터 <산중전기><악령의 웨딩드레스><천년백랑><요권괴권>

물론 박윤교의 필모그라피가 모두 공포영화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살피다 보면 그는 분명히 공포영화에 관한 관심과 애정이 지대한 인물이었다. 60년대 말 <백발의 처녀>(67) <마녀성>(68)로 공포영화를 접하기 시작하다가 <백골령의 마검>(69)에서 큰 흥행을 맛 본 박윤교는 70년대 들어서 ‘한 (恨)’에 기초를 둔 연작의 공포영화를 선보인다. 당대의 톱스타인 윤미라가 공연한 <옥녀의 한>(72) <며느리의 한>(73), <꼬마신랑의 한>(1973), <낭자한>(1974)등이 그 작품들이다. 그러다가 더 이상 이 한국재래식 귀신으로는 관객을 자극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70년대 중반 이후 홍콩과의 합작이나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이국적인 스펙터클을 제시하며 돌파구를 찾는 다. <낭화비권>(78), <산중전기>(79) <인무가인>(80), <요권괴권>(82)등이 이때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없던 공포영화를 향한 그의 노력은 같은 시기에 현대적 공포물인  <망령의 곡>(80) <망령의 웨딩드레스>(81)을 내놓지만 관객에게 그다지 환영받지는 못한다.

왼쪽부터 <흡혈귀야녀><공포의 축제>

80년대에 들어와서 이런 박윤교의 노력을 ‘김인수’가 받는다. <월녀의 한>(80)으로 처음 공포영화에 접한 그는 <흡혈귀 야녀> (81) <원한의 공동묘지> (83) <미녀공동묘지>(85) 김<공포의 축제> (86) 등을 선보이지만 김인수 역시 새로운 공포적 소재를 내놓지 못한채 과거의 공포영화를 답습하는 수준에서 멈춘다.


그 외에 김영환 감독의 <목없는 여 살인마> (85)와 이혁수 감독의 <여곡성>(86)이 있었으나 이 작품들 역시 관객에게 외면을 당한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공포영화는 큰 흥행을 노리는 야심찬 기획이 아닌 지방관객을 겨냥한 소규모 기획물 수준을 넘지 못하며 ‘하위 싸구려 장르’로 추락하며 충무로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감독들은 모두 이 장르를 기피하게 되고, 젊은 영화인들조차 이 장르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공포영화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을 때 충무로는 공포영화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가진 영화청년 하나를 받아들이는데 그가 바로 ‘김성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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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 인터뷰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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